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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너의 수감 번호는 264번이다", "그래! 내 호를 이육사로 해야겠어"

 

서울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927년 이원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갇히었을 때, 죄수 번호가 264번이었습니다. 이후 시인으로서 활동한 그는 자신의 이름인 이원록 대신 이육사(264)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절대 꺾이지 않는 펜, 일제 저항 시인 이육사

독립운동을 하던 이육사가 왜 시인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궁금해서 지금부터 이육사에 대한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육사의 어린 시절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낙동강 줄기에 자리 잡은 그의 고향은 7월이면 동네 어귀마다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마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육사의 이름은 이원록이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그리고 할아버지가 들려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절개와 기상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무릇 선비란 절개가 있어야 하느니라. 우리 집안은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대대로 선비의 절개가 빛난 가문이다."

 

◆ 일본 유학과 의열단에 가입

 

이육사를 그린 드라마 절정에서

1910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았고, 날이 갈수록 더욱 가혹하게 통치를 했습니다. 안동에서 대구로 이사 간 이원록은 근대적인 학문을 배웠고, 1924년 19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에서 1년 넘게 여러 학문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1925년 귀국한 이원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열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였습니다. 의열단은 '맹렬하게 정의를 위해 싸우는 단체'라는 뜻입니다.

 

조선의용대 창설기념사진

이원록은 의열단의 단원이 되어 식민 통치 기관, 일본 경찰이나 군인, 친일파를 처단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 이원록은 형제들과 함께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며, 앞으로 어떻게 독립운동을 해야 할지 알아보았습니다.

 

◆ 열일곱 차례나 감옥에 갇힌 이원록의 첫 번째 감옥살이

 

사진 확대 서대문형무소 시구문

그러던 중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폭발물이 터져, 일본 경찰이 큰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폭발물을 설치한 인물이 잡히지 않자, 일본 경찰들은 범인을 잡는다는 구실로 이원록을 비롯해 많은 민족운동가를 잡아들였습니다.

 

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 잡힌 이원록은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고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결국 이원록은 2년 이상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열일곱 차례나 감옥에 갇힌 그의 첫 번째 감옥살이였으며, 이때 수감 번호였던 264번은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답니다.

 

◆ 자결 순국을 택한 장진홍 의사와 억울한 이육사의 감옥살이

 

일제에 의해 치욕을 당하기 싫다라고 하며 자결순국을 택한 장진홍 의사

1929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발물을 설치했던 실제 인물인 장진홍 의사가 일본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이육사는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육사는 신문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일본에 저항하는 의지를 담은 시를 발표했습니다. 그럴수록 이원록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모습
현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그러던 중 대구 시내에 일본을 비판하는 글이 몰래 붙었는데,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아 이육사는 또다시 2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 무장 독립투쟁에 참여한 이육사

 

무장 독립투쟁에 참여한 이육사

감옥에서 풀려난 이육사는 예전부터 꿈꿔왔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중국을 자주 왕래했습니다. 중국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원들을 만난 이육사는 무장 독립투쟁에 참여하기로 했으며,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의열단이 설립한 군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이육사 옥사

"이육사! 큰 결심을 해줬소. 독립의 그날을 위해 열심히 훈련받은 뒤 일본군과 본격적으로 싸워 보세."

"예. 앞으로 열심히 훈련받아서 독립운동의 선봉이 되겠습니다."

 

 

이육사는 군사학교에서 비밀통신, 선전 방법, 폭파 훈련 등을 교육받았으며, 교육을 마친 이육사는 1933년에 귀국했습니다. 부여받은 비밀 임무를 행동에 옮기기 전, 처남의 자수로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육사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육사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아! 나의 독립운동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감옥 안이라도 멈출 수가 없다."

 

이육사는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건강이 더욱 나빠졌으며, 그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의열단원으로서 무장 투쟁에 앞장설 것인지, 아니면 건강을 이유로 독립운동을 그만두고 일반 사람처럼 생활할 것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 저항 시인 이육사의 탄생과 시를 써서 민족의식을 높이다!

 

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이육사 본인 사진(왼쪽)과 이육사의 또 다른 필명인 ‘이활(李活)’로 쓴 서명(우)

오랜 생각 끝에 이육사는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일깨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문학을 통한 이육사의 새로운 항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답니다.

 

이육사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맞서 저항적인 성격의 여러 글과 시를 써나갔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발표되었던 '광야'가 대표작입니다.

 

[광야]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

이육사가 쓴 '광야'라는 시에서 광야는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 즉 조국의 땅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매화 향기는 매화가 아직 추운 겨울이 가기 전에도 피어 향기를 남기는 만큼, 꿋꿋한 민족의 정신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모두가 예상하듯이 광복을 뜻합니다.

 

앙상한 나무가지에는 암울한 그 시절의 아픔이 서려있다

광복을 이룩해 줄 인물, 즉 민족의 뛰어난 지도자를 뜻한다고 보아, 광복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확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육사와 같이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쓰는 것은, 무장 투쟁과는 다른 방법의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육사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절정'이라는 시가 있는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담겨 있어서 '광야'와 함께 대표적인 저항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절정]

 

절정 시

1941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 민족 말살 통치를 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못 쓰게 했으며, 심지어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정책에 맞서 이육사는 잡지에 일본어로 된 문학작품을 싣지 않기 위해 한자로 된 시만 발표했습니다.

 

* 이육사 동상과 시비(이육사문학관)

 

이육사 동상과 시비(이육사문학관)

◆ 이육사, 중국에 있는 일본 감옥에서 순국

 

일본의 민족 말살 통치로 우리말로 된 문학작품 활동이 어려워졌으므로, 그래서 이육사는 1943년 4월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가 무기를 국내에 들여와 일본과 직접 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육사 순국한 일본 지하감옥, 베이징에 여전히 존재

그러던 중 그해 7월 어머니와 형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귀국했다가 일본 경찰들에게 다시 잡히었습니다. 며칠 후 이육사는 조사를 받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거쳐 일본 헌병대 베이징 감옥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고문에 시달리다가 몇 달 후 1944년 1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란만장한 이육사의 생애는 이처럼 중국에 있는 일본 감옥에서 끝나고 말았답니다.

 

1943년 이육사의 생전의 마지막 사진

그가 순국한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에, 이육사가 그렇게도 오기를 고대하던 광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듬해 문학계 동료들에 의해 이육사의 원고가 정리되면서, 그의 첫 번째 시집인 '육사 시집'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이육사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이육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랍니다.

 

이육사를 주인공을 한 드라마 절정이 방송된 가운데,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또한 이육사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무려 17번이나 감옥살이를 했지만,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시를 쓰는 활동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민족의식을 깨웠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시에 고스란히 남아,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답니다.

 

※ 이육사 묘소, 63년 만에 생가터로, 2023년 4월 5일 이육사문학관 옆으로 이장

 

안동 태화동으로 옮겨진 이육사 생가
이육사 선생 묘소(이육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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