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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로 여행 갈까. 서울 윤동주 하숙집터를 찾아서
짧은 나의 글로써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거목 윤동주 시인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고 주저하게 되고부끄럽기만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조선인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 시인, 그 윤동주 시인이 학창 시절 하숙했다고 알려진 집터가 보존되어 오고 있었던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나요? 우리 함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네를 거닐어 보는 건 어떨까요?
◆ 작가의 집에서 하숙한 시인
박노수 미술관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다고 알려진 장소가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바뀌고, 기둥에 붙은 팻말만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약 4년 동안 서울(당시 경성)에 머무릅니다. 원래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3학년 때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이란 후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합니다.
정병욱의 회고록에는 이 시기에 윤동주와 하숙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할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숙생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어 직접 찾아갔는데, 그 집이 평소에 존경하던 작가 김송의 집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집에서 하숙하기로 결정했고, 머무르는 동안 윤동주는 아침 일찍 인왕산에 올라 사색을 하기도 하고, 흐르는 계곡물 아무 데서나 세수를 했다고 합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집주인 김송과 문학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인 김송은 함경도 출신의 항일작가였는데,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저녁마다 형사가 찾아와 집안을 뒤지고, 윤동주가 읽는 책의 제목을 모두 적어갔습니다.
어떤 날은 모든 짐을 검사해 편지를 뺏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집주인인 김송은 이런 부분을 미안하게 생각했고, 윤동주와 정병욱은 안전을 위해 가을학기가 시작될 즘, 새로운 하숙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윤동주가 옮긴 집은 북아현동이었는데, 이곳에는 또 한 명의 유명 문인인 정지용 시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같은 동네에 머무르고 있어서, 유학 전까지 북아현동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김송의 하숙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윤동주는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시의 내용은 실제 자신의 경험과 시대적으로 힘든 현실을 반영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 윤동주 하숙집터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길 57
■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
시인 윤동주가 꾸준히 적어 내렸던 영롱한 시어들에는 그의 삶과 실천의 궤적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고요하면서도 치열했던 그 성찰과 모색의 길목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어려운 식민지 상황에서도 문학을 통해 꼿꼿이 시대와 삶의 방향성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현실을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를 한글로 꾸준히 남겼고, 바로 이 때문에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수감되어 27세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험에 빠트렸던 시편들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며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 윤동주의 시
그가 남긴 124편의 시와 산문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동아시아인이 기억하고, 세계인이 공감하는 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서시" , "십자가" , "별 헤는 밤" 등의 시를 통해 맑고 순수한 영혼이 지상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신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윤동주의 시는 그 이후에도 각 시대와 청년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 소년 윤동주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1895~1965)과 모친 김용(1891~1948)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윤동주 집안은 19세기말 이곳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명동촌은 민족교육, 독립운동, 신앙생활을 지향한 조선인 공동체의 터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동주는 이러한 고향 마을에서 자연스럽게 한글, 한학, 신앙심을 함양하며 자라났습니다.
1932년 용정으로 이사한 윤동주는 만 14세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는 동기들과 교내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도 뛰고, 교내 웅변대회에서 1등도 하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던 1934년 12월 24일 윤동주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초한대" 등의 시를 쓰게 되는데, 이것은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입니다. 그는 이때부터 작품과 창작날짜를 적은 시편을 창작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 소년 윤동주의 창작(습작) 노트
이 시기 소년 윤동주는 정지용(1902~1950)이나 백석(1912~1996)을 비롯한 여러 시인의 문학작품을 탐독하고 일간지에 실린 작품과 평론을 스크랩하기도 하며 시 창작을 시도했습니다.
용정 외가에 들른 동요 시인 강소천(1915~1963)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습작 노트는 두 권인데, 1934~1937년까지 쓴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와 1936~1939년까지 쓴 "창"이 있습니다.
◆ 연희전문학교 시절 청년 윤동주
윤동주는 1938년 4월 경성(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로 유학을 갑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고향 용정으로부터 경성으로 오는 머나먼 여정을 떠났던 것일까요?
윤동주는 본디 우리말과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였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한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식민 교육정책 속에서 민족과 세계의 지식과 문화를 온전히 배울 수 있는 곳은 드물었습니다.
윤동주는 미션스쿨 연희전문의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 속에서 꿈꾸던 문학과 학문을 본격적으로 흡수하고자 했습니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탄생
윤동주 생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은 시집입니다.
원래 그는 이를 자선 시집으로 77부 출간하려 했지만, 당시 한글 출판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상황에서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에 윤동주는 자필로 시집을 3부 작성하여 1부는 자신이 가지고, 스승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단 한 권의 윤동주의 자필 시집은 정병욱에게 선사한 것입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자료제공 : 한국관광공사, 구글 아트 & 컬쳐(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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